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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rospect

CHI2024 Submission 회고

by 랩인턴 중인 학부생 땅콩 2023. 12. 31.
본문은 내년 1월 19일의 CHI2024 R&R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시점에서, 1년 간의 여정을 되짚어보려 작성되었습니다.

 

고스란히 1년이 걸린 작업이었습니다. 올해 1월, 임하진 교수님과 kick-off meeting을 하면서 "저 정말 카이 낼 수 있을까요?" 라고 여쭤봤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저는 한결같이 연약하고 불안정해서, 주변인들의 지지만으로 이 불안을 떨쳐내기란 역부족이었기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짐작했던 것처럼 이번 연구는 제게 상당히 큰 도전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불신과 더 똑똑한 사람에게 더 많은 책임을 맡긴다는 달콤한 선택지가 있었기 때문에 70% 가량의 프로젝트에서 서포터의 역할에 만족해 왔거든요. 그래서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떤 일 하나를 주도적으로 이어 온 것도, 1저자로 논문을 내 본 것도 모두 처음이었습니다. 사실 멋모르고 일을 벌렸다는 말이 맞겠습니다. 보통 시작이 이러면 흐지부지 끝나기 마련인데, 여정 내내 매달 최소 1~2번은 미팅을 해주신 교수님이 계셨기에 제출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쁜 학기 중에도 여기까지 해냈으니, 내년부터는 누군가 좋아하는 일을 묻는다면 연구라고 답하려고 합니다. 그 모든 고민의 과정, 며칠 좌절했다가도 다시 일어나 읽고 쓰는 것들을 모두 포함한 의미에서요. 그래서 이번 submission을 기점으로, 학부를 졸업하면 대학원에 가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래서 바쁘신 와중에 많은 신경 써주신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도와주신 덕분에 평생 하고 싶은 게 생겼어요. 정말 기쁩니다.)

 

  어쩌면 2022년 7월부터 올해 7월까지의 KIXLAB 인턴 경험이 적어도 "연구를 한다"는 것에 대한 정체 모를 두려움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었기에 가능했다고도 생각합니다. 연구의 구상 단계부터 실험, 작성까지 경험해 보았다는 것이 학부생에게 얼마나 큰 재산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심지어 김주호 교수님 지도에, 박사 과정 선생님이 멘토였으니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주제에 대한 애정을 점점 잃으면서 2저자로서 많은 걸 회피했고, 너무 대단한 사람들의 작품에 손을 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어요. 그 와중에 다음엔 부족하더라도 반드시 모든 의사결정을, 이 흐름을 스스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갈망이 생긴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월등한 지식과 능력에 의존하거나, 어려운 작업을 위임이라는 말로 회피하지 않기 위해서요. 그런 경험이 간절히 필요했던 한 해였습니다. 자신에게 네가 독립적인 주체로서 뭔가를 해낼 수 있다고 증명하는 경험이요. 인턴 과정 내내 많은 후회와 자책이 남았기 때문일텐데, 모순적이게도 가장 이상적인 시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무지와 부족함을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통념(痛念)할 수 있는 시작이었기에 앞으로의 여정을 더 겸손하게 밟아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패기 있게 시작한 연구였으나 쉽지 않았던 것 은 시간과 멘탈 관리였습니다. 원인은 저에 대한 과대 평가와 할일의 양에 대한 과소 평가의 환장의 콜라보레이션에 있었다고 결론을 내려봅니다. 상반기에는 IRB의 승인을 받고 참가자를 모집한 것이 다였지만, 인턴이었던 ASR 연구가 한창 막바지였던 데다 14학점이 약간의 부담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름 방학에는 연구 참여자분들과 디자인 워크숍을 진행하고 데이터를 코딩해서 결과 흐름을 만드느라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과정 중에 사흘을 통으로 잠만 자기도 했고, 무기력에 발목을 잡히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취미였던 파워리프팅이 멱살을 잡고 텐션을 끌어올려 주었지만, 역부족일 때도 있더라구요. 지금 와 생각해보면 제 몸집보다 큰 책임이나 기대에 대한 적응 기간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어진 2학기에는 미련하게(?) 19학점을 끌고 오면서 과제를 제출하지 않거나 기말고사 준비를 3시간만에 끝내버린 일 등을 합리화했는데요. 연구 진행이나 필수적인 수면을 타협할 수는 없었던 그때의 저로서는 최선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후회는 하지 않되, 학부 졸업 전 또 연구를 하게 된다면 15학점 이내로 수강하기로 약속.

 

  뿐만 아니라 영어 논문을 읽고 쓰는 과정에서 제가 영어와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님을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요. 일찍이 문헌연구 부분을 구성할 때 알아챘고, 초안이라고 써둔 글을 3개월 후 다시 봤을 때 그 심각함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초반의 성의없음에 분노해서 SNS에 "이딴 걸 초안이라고 쓴 과거의 날 때리고 싶다"고 올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기존 페이퍼를 읽는 과정에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ChatGPT의 요약과 DeepL의 번역에 의존했습니다. 이 부분은 2024년에 AI 디톡스를 하면서 찬찬히 개선해나가려고 합니다. 작문도 겨울 학기 AE Writing을 수강하면서 조금 나아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간에 여유가 있는 만큼 좋은 페이퍼들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Obsidian에 저만의 리뷰를 주섬주섬 모아놓으려 합니다. 결국 영어는 지금부터 잘 갖춰놓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제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얻은 것. 연구자로서는 19일 후에 Accept을 받는 것이 가장 큰 수확이겠습니다만, 이 시점에서 1저자로 연구의 종지부까지 직접 찍어보는 경험 자체가 무엇보다 귀했다고 생각합니다. 각 파트를 어떻게 구성해야 하고, 교수님이 제 초안을 수정하실 때 어떤 점을 주로 보시는지, 리뷰어들의 코멘트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같은 것도요.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것들이 다 자산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발 내딛으면 그게 바로 길이잖아요? 그러니 막연함이라는 벽을 하나 허물고 한 걸음 나아간 것이 올해의 가장 큰 성과였다고 자랑하겠습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다'는 평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엔 그렇지 않다면서 극 부정했는데요, 여름 내내 선생님들을 곳곳에서 만나고, 그분들의 생각을 듣고 깊게 파고들어보면서 인정하게 된 것이 의미가 컸습니다. 동시에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을 깨달은 것이 앞으로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함께해주신 교수님과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신 부모님은 물론이고 연구참여자를 모집할 때 도와주셨던 분들, 기꺼이 시간과 경험을 나눠주셨던 체육 선생님들, 마주칠 때마다 응원해준 정문과 언니들과 생일 전날 파일럿 스터디를 도와준 온유와 지은이, 언제나 사랑하는 주황이, 지칠 때 따듯한 밥을 같이 먹어준 태훈과 호림 선배가 아니었다면 절대 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앞으로의 마음가짐. CHI2024의 결과가 곧 나오겠죠.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일전에 교수님께 말씀드린 것처럼 이 연구를 더욱 보완할 계기로 삼겠습니다. 양쪽 모두 앞으로 몇 번 씩은 더 마주할 일이니, 일희일비 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 들이려고 합니다. 혹여 페이퍼가 reject이 되더라도 저라는 사람이 거절당한 것은 아니니까요(물론 말은 이렇게 해도 아직 많이 무섭습니다. 염치없지만 곁에서 많은 위로와 칭찬 및 우쭈쭈를 부탁드립니다, 미리 감사해용). 2024년에도 꾸준히 한 발씩 나아가겠습니다. 설령 휘청휘청하거나 주저 앉을지언정 드러눕지는 않을게요. 

 

P.S.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올해 많은 부탁만 드리고 살았습니다.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하는 마음 전부 전하지 못한 것 같아 또 미안한 연말이에요. 혹시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말씀해주세요. 대출과 보증 빼고 다 해 드릴게요.

앞으로 일 년 또 같이 예쁘게 피어나 보아요(하트). 고맙습니다.


1년 애쓰셨습니다.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말자(고양이, 1년 8개월)의 가호가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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