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흐린 날씨였다. 마감이 열흘도 채 안 남은 논문 때문에 새벽 5시부터 데이터를 들여다봤고, 안되겠다 싶어 운동을 갔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글쓰기를 시작한 지 2시간이 지나자 집중력이 흐려졌고, 내가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던 와중, 전화가 울렸다. 반갑게 받은 전화는 10년지기 친구 H로부터 온 것이었다. H는 최근 가족(어린 동생 둘과 부모님)과 함께 다낭에 다녀왔다고 했다. 다낭은 덥고, 덥고, 더웠다는 총평을 남긴 H는 끔찍하게 부지런해야만 했던 패키지 여행의 일정 때문에 이제 베트남에 대해 설명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여행을 다녀온 것인지 학교를 다녀온 것인지 모르겠다며, 앞으로 여행을 갈 생각이 조금 사라졌다고 했다.
나는 요즘 힘들어 죽겠다는 말과 함께, 언제나 그렇듯이 최근 한 달 사이에 있었던 사건들을 속속들이 다 불었다. "저번에 애나와 부산에 갔는데, 시험 기간에 놀았더니 두 배로 재밌더라", "틴더를 다시 깔았다가 희망이 없어서 인스타 아이디만 남겨놓고 지웠다" 등 H가 아니면 못 할 소리를 늘어놓았다(이처럼 H는 내 시시콜콜한 사건들까지 전부 알고 있다. 누군가 나와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내 과거를 알고 싶다면 H를 찾아가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어 "내가 웃긴 얘기 해줄까"로 운을 뗀 것이 이야기의 상대방에겐 실례일지 모르나, 적어도 H에게는 사실이었다. 만난 지 하루만에 결혼 얘기가 오갔다거나(난 진심이었다), 자신의 운으로 일어난 좋은 일을 나에게 기인하며 날 "My lucky charm"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은 H는 당황해하며 "개연성이 없다"는 한줄평을 남겼다. 그러면서 자신의 시나리오가 인과관계가 부족하다고 욕 먹는 이유는 다 나 때문이라며, "와 너 진짜 엠지(MZ)같다"는 소감도 들려주었다. 영화도 그렇게 만들면 욕 먹을 거라면서, "난 너를 10년 동안 봤지만 네가 행운의 여신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며 깔깔댔다.
그런가? 어느 정도는 타당성이 있는 말 같다고 생각했다. 23년 동안 전통적으로 내 인생엔 개연성이 없었다. 그림 그리다가 총을 쏘질 않나, 대학에 오고 난 후에는 갑자기 디자인에 관심에 생겼다가 이제는 연구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내년엔 파워리프팅 대회에 나가려고 벼르는 중인데, 그 연결성을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고 싶었다>만이 내 여정을 설명해줄 수 있는 유일한 문장이다. 이렇게 살아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까지도 잘 살아왔는데 뭐 어떤가 싶었다.
아마 H는 이 글도 개연성이 없다고 하겠지만,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살다 보면 뭐 반할 수도 있고 그런 거지. 개연성 찾으려면 운명적으로(?) 10년 동안 유연한 관계를 유지해 온 H와 결혼하는 편이 최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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