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사촌 동생 애나와 나눈 대화 몇 마디였다. 부산을 가장 좋아하는 지역으로 꼽는 나는 "한국에 있으면서 부산은 가 봤어?" 하고 물었다. 애나는 "4월에 갔었는데, 바람 불고 춥고 난리도 아니었어"라고 대답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다또부(다겸 또 부산)"라는 말을 듣는 나는 애나가 부산 여행을 만끽하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가는 일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럼 마지막 주말에 송정으로 서핑 가자!! 가서 요트도 타고, 회도 먹고, 패들보드도 타자!"며 냅다 일을 벌렸다. (그때는 몰랐다. 여행 직후에 팀플로 밤을 새게 될 줄은.)
이번 봄 학기 연세대학교로 교환학생을 온 애나는 WU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있는, 나보다 두 살 어린 예쁜 동생이다. 신촌과 관악 사이의 먼 거리와 악랄한 과제량으로 인해 (한마디로 나 먹고 살기 바빠서) 학기 중에 많이 신경을 못 써 주었던 점도 걸린 데다 내가 미국에 갔을 때 작은 이모께서 혼신의 힘을 다해 놀아주셨기 때문에, 아쉬워하는 애나를 절대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다. 부모님께 말씀드린 후에는 일사천리였다.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내 할일이 왕창 늘어나버렸지만, 광안리 근처에서 부모님과 묵을만한 말끔한 호텔과 서핑 강습을 예약하고 맛집을 알아보는 일은 귀찮음을 이길 수 있는 설렘을 주었다. 혼자 갔다면 그냥 바다 바로 앞 캡슐 호텔에 몸을 욱여넣었겠지만, 이번만은 엄마의 성화를 듣느니 예약이 가득 찬 호텔들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는 일을 반드시 성공해내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언제나 뭔가 하나씩 빼먹는 내가 애나의 미들 네임을 빼 먹고 비행기 표를 예약한 탓에, 김포공항 입구에서 턱 하고 막혀버렸을 때에는 정말이지 어쩔 줄 몰랐다. 다행히 10분 내로 해결되었지만 만약 우리가 보딩 시간에 촉박하게 도착했다면...으, 끔찍하다. 애나는 그날 잠을 한 숨도 못 잤다고 했는데, 우리 둘 다 다음 다음 날 중요한 학교 일정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즐길 수 있을지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잠깐의 걱정이 무색하게, 해리단길에 도착한 우리는 신나게 텐동을 먹어치우고 생각보다 더 뜨거운 해운대를 거닐며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한 잔 씩 들이켰다. 그리고 6월 중순의 해운대를 맨발로 거닐며 파도에 무릎을 담구었다. 나는 틈이 날 때마다 연구용으로 사 둔 입문자용 소니 캠코더를 꺼내들고 파도와 애나를 사진을 찍거나 영상에 담았다. (그리고 나는 연구에 그 캠코더를 한 번도 쓰지 못했는데, 배터리 용량이 3시간의 워크숍을 녹화하기엔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시 버스를 타고 30분을 간 후에야 송정 해수욕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핑 강습을 예약한 곳은 정말 정직하게도 "서핑 스쿨"이라는 상호명을 갖고 있었는데,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가자마자 마주친 카운터의 남자 직원이 전형적인 꽃미남이셨던 탓에 자리에 앉은 애나와 나는 한창 "잘생긴 바다 남자"라는 주제로 호들갑을 떨었다. "오, 우리 선생님이 저 사람 말고 중년 아저씨였으면 좋겠다. 저런 사람이 가르쳐주면 분명 긴장할 거야"라고 애나가 말했다. 나 역시 예쁜 남자는 조금 부담스러웠기에, 그녀와 100% 같은 마음이었다. 그날 "서핑 스쿨"의 2시 강습 시간에는 우리 둘 말고도 3인 가족이 함께 있었다. 부모님과 손 잡고 온, 초등학교 4학년 쯤 되어 보이는 어린이었다. 간단한 안내를 받은 후, 안간힘을 쓴 끝에 간신히 몸을 수트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수트를 입고 나오자 평범한 TV에 평범한 서핑 강습 영상이 나왔다. 서핑보드의 구성, 푸쉬 자세, 업 하는 방법... 생소했지만 간단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실기였다. 난 체육교육과긴 하지만 선수생활을 했던 클레이사격을 빼면 시체나 다름 없는 자칭 타칭 "체교과 최약체"였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 나보다 1.5배 쯤 긴 서핑 보드를 모래사장에 눕혀 놓은 채 했던 초반 강습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수트는 덥고 햇빛은 내리쬐는데다 모래가 계속 눈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 타임의 강사 선생님은 많이 쳐줘야 28살 정도 된 것 같은 남자였는데, 내가 잠깐 다른 곳을 보는 것을 눈치 채곤 스냅핑으로 나의 주의를 끌었다. 생전 처음 보는 방식에 잠시 당황했으나(나중에 애나는 그가 정말 무례하게 굴었다고 말했다), 내가 강사였어도 단기 수강생이 집중 안 하면 좀 그렇겠다 싶어 가만히 있었다.
10분 정도의 지상 어푸어푸가 끝난 후 우리는 드디어(!) 바다로 입수할 수 있었다. 바닷물은 기분 좋게 차가웠고, 물에 빠진 뒤에나 알게되었으나 혀가 소금에 절여질 정도로 짰다. 우선 푸쉬만 해보라는 선생님의 말을 귓등으로 들은 우리는 첫 파도부터 일어나려고 했고, 선생님은 저멀리서 "푸쉬만 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죄송해요~~~"로 응답했으나 들었을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냥 서로 못 들었으니 쌤쌤인 셈 치자. 송정의 파도는 그닥 임팩트가 크지 않아서, 초보자가 서핑을 배우기엔 좋았지만 가끔씩은 흥이 깨졌다. 나는 세 번에 한 번 쯤 보드 위에서 서는 시늉이라도 해볼 수 있었는데, 그 말은 즉슨 파도를 타는 족족 물을 먹었다는 소리다. 그 와중에 같이 온 4학년 어린이는 거의 다섯 번만에 완벽한 자세로 파도를 타는 데 성공해서,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난 체중 감량의 필요성을 뼈져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럼에도 서핑은 꽤나 재미있었다. 일어나는 타이밍을 잡는 것이 어려웠지만, 몇 번 감을 잡고 나니 적어도 실수해서 물에 빠지는 게 무섭지는 않게 되었다. 바다에서 하는 강습은 한 시간 이십 분 가량이었는데, 입수한지 30분 쯤 지난 시점에 다시 보드에 올라가려고 끙끙대는 내게 선생님이 물었다. "유학생이에요?" 아니다. 난 여행 이외의 목적으로 한국을 떠나 본 적이 없고, 애나가 미국인이어서 영어를 쓰고 있을 뿐이었다. "영어 잘해요?" 당연했다. 보드에 간신히 엎드린 뒤에도 질문 세례는 이어졌다. "어느 학교 다녀요?" 난 관악에 있는 넓기만 한 학교에 다니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못 알아 먹을 테니 그냥 학교명을 말해줬다. 그는 듣자마자 우와 영광이네 어쩌네, 하며 같이 온 가족 손님에게 "이분 서울대 다닌대요!!" 라고 외쳤다. 역시,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더니... 그 뒤로 그는 나에게 이상하리만치 큰 호의를 보이며 강습을 계속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느라 선생님의 목소리가 다 쉬어갈 때 쯤, 강습이 끝났다. 보드와 수트 대여는 무제한이라 우리에겐 바다를 더 즐길 시간이 있었지만, 애나와 나에겐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배가 고팠다. 그렇다, 서핑은 생각보다 더 에너지가 많이 드는 스포츠였다. 잘 하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만 보고 서핑을 만만하게 보지 마시라(내 얘기다). 체력이 남아있었다면 바다에 머물렀겠지만, 잠도 제대로 못 잔 채였던 우리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보드를 힘겹게 원상태로 돌려 놓았다. 샤워실로 돌아가 소금기를 씻어낸 후 평택에서 차를 타고 먼 길을 오시는 부모님을 기다리며 우리는 저녁 메뉴와 다음 액티비티를 고민했다. 저녁으로 유명한 회전초밥을 먹고 저녁 여덟시에 요트를 타러 가면 매우 낭만적일 것 같았다. 우리는 심지어 불꽃놀이도 해 주는 요트 투어를 예약하고, 다시 캠코더를 꺼내든 뒤에야 "서핑 스쿨"을 나섰다.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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